음악예술론은 감성독재를 위한 반동이론

김주원· 탈북자
2019-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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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신문에 실린 김정은 우상화 가요.
노동신문에 실린 김정은 우상화 가요.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녘 동포 여러분! 북한에서 문학예술은 김씨 왕족의 영원한 후계 세습을 위한 선전선동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북한당국은 음악예술을 주체음악 혹은 주체예술로 정의합니다. 김정일은 1970년대 초에 영화예술론을 1990년대에 들어 와서는 주체문학론, 무용예술론, 음악예술론, 미술론, 건축예술론 등 문학예술에 관련된 여러 노작들을 발표하였습니다. 1991년 7월 17일에 발표되고 1992년에 출판된 음악예술론은 북한 음악예술작품창작의 사상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에 지구상에 존재하던 공산국가들이 이론적 모순과 경제침체, 국민적인 반발로 사회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자본주의로 복귀하자 이에 당황했던 김정일이 1991년에 발표한 음악예술론은 어디까지나 김씨 왕족의 영원한 계승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김정일은 음악예술론에서 주체음악을 강조하면서 주체음악이 되는 조건을 강조하였습니다. 그 조건으로는 내용은 혁명적이어야 하며 형식은 인민적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민족음악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예술성과 함께 사상성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국가들에 유학을 하였던 예술전문가들이 북한의 음악창작의 주류를 이루었던 상황에서 사회주의가 망한 나라들의 음악보다 ‘우리식’이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던 것입니다. 김정일은 음악예술론에서 “새 시대, 주체 시대의 요구와 인민대중의 지향을 그 내용과 형식에서 철저히 구현한 새 형의 음악예술로서 선행한 모든 음악예술과 뚜렷이 구별되는 고유한 특성을 갖는다” 고 강조하였습니다.

주체음악에서 민족성을 강조한 것은 해방 후 1946년 8월에 김일성이 중앙교향악단 창립공연을 보고 나서 예술인들 앞에서 한 연설에서도 언급되었습니다. 김일성은 “음악은 민족적 특성을 살리면서 혁명의 요구에 맞게 발전시켜야 한다. 우리의 음악은 우리 인민의 감정과 정서에 맞고 새 조국 건설에 일떠선 우리 인민의 혁명적 지향에 맞아야 하며 민족적 해방을 이룩하고 새 생활 창조에 일떠선 우리 인민의 환희와 기쁨, 긍지와 자부심, 혁명적 열정을 반영한 참말로 인민적이며 혁명적인 음악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해방 후 소련군이 북한에 상주하고 모든 국가권력을 소련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던 당시에 김일성의 이 민족음악 장려에 대한 강조는 무색해졌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구소련과 동독을 비롯한 동유럽국가들에 유학을 다녀왔던 상황에서 북한 음악은 민족성보다 유럽 형식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북한주민들은 소련노래들을 즐겨 불렀고 러시아 댄스에도 익숙해졌습니다. 대표적인 노래들로는 ‘모스크바의 밤’, ‘카츄사’, ‘왈렌끼’ 등이었습니다. 1980년대 초에는 북한에서 디스코춤이 유행되면서 평양의 대학생들은 물론 지방대학생들도 외국 음악에 맞춰 디스코춤을 추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1985년 8월 15일 평양시 중구역에 있는 평양체육관 앞 광장에서 진행된 조국해방(광복) 40돌 기념 야회에서 마음껏 디스코춤을 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날 한 대학생이 술에 만취되어 춤을 추다가 한 여대생의 다리를 부여잡는 일이 벌어져 김정일에게 보고되어 내적인 방침으로 디스코춤을 제한할 데 대해 하달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수 십년 동안 오직 김일성과 김정일을 찬양하는 노래만을 불러야 했던 북한에서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계기로 외국노래들이 더 많이 유포되어 불려졌습니다. 그 당시 “김정일장군님은 전 세계 노래를 다 듣는다. 한번 들은 노래는 더 이상 듣지 않는다. 장군님은 미국 노래도 대단히 좋아한다” 등 많은 소문들이 돌았습니다. 저도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니면서 외국어문학부 친구들을 통해 러시아노래 ‘백만송이의 장미꽃’을 비롯하여 영국, 독일 등 다른 나라의 유행곡들과 댄스곡들을 듣고 배우기도 하였습니다. 평양시 중구역 연화동 김책공업종합대학 도로 맞은 켠 윤이상음악당 뒷건물에 민족식당이 생겼습니다. 외화식당인 이곳에서는 악사들의 노래 연주에 맞춰서 디스코춤과 사교춤을 추는 댄스홀도 있어 북한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물론 북한에서 권력이 있거나 돈 있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진수성찬에 배를 채우고 춤과 노래로 쾌락을 즐겼습니다.

김일성의 출생기념일을 맞는다며 막대한 돈을 탕진하면서 외국 예술인들을 끌어들여 해마다 벌린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 참가한 조중동포들의 연변노래도 인기를 끌면서 북한주민들은 북한노래보다 외국 노래, 연변노래에 더 익숙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틈을 타서 한국노래들도 카세트에 담겨져 유포되었습니다. 저도 그 당시 ‘아파트’, ‘갈무리’, ‘바람바람바람’ 등 많은 노래들을 알게 되었고 친구들만 모인 장소에서는 술 한잔 마시고 나면 한국노래를 불렀습니다.

평양을 중심으로 지방 도시들에도 외국 노래와 디스코춤이 유행되면서 딱딱하고 고리타분한 김씨 찬양가가 점점 주민들에게는 ‘듣기 싫은 노래’, ‘부르기 싫은 노래’로 되어갔습니다.

북한당국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북한의 예술음악 정기간행물인 ‘조선예술’잡지 1993년 1월호에 김정일의 음악예술론에 대한 해설하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습니다. 기사에는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의 불후의 고전적 노작 음악예술론은 우리 음악을 사회주의, 공산주의 음악예술로 발전시켜나가기 위한 독창적인 사상이론들과 그 실현방도들을 전면적으로 밝혀주고 있는 백과전서다. 모든 당원들과 근로자들, 특히 문학예술부문의 일꾼들은 노작에 담겨져 있는 심오한 사상이론을 깊이 연구 학습하여 우리 당의 주체적인 음악이론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철저히 구현해 나감으로써 우리 시대 음악예술, 주체음악예술발전에 적극 이바지하여야 할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북한당국이 음악예술에 주체를 입혀 주체음악이라는 생소하면서도 억지스러운 표현을 쓰게 된 데는 다른 사회주의 나라들의 붕괴를 보면서 위기감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김정일은 음악예술론에서 “지난날의 음악에 반영된 진보적인 사상은 적극적인 것으로 되지 못하였으며 투쟁의 진리를 밝히지 못하고 많은 경우에 자연을 노래하거나 순수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데서 극히 피상적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자연이나 노래하고 순수한 아름다움이나 보여주는 음악은 사실상 인민대중의 투쟁에서 별로 큰 의의를 가지지 못한다’고 강조하기도 하였고 ‘참다운 음악이 보여주어야 할 인간은 자주성을 생명으로 하는 인간으로서 사회정치적 집단에 충실한 인간, 사회정치적 생명체안에서 영생하는 인간이다. 음악은 이러한 인간의 사상감정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하였습니다.

음악예술론의 가장 반동적인 내용은 김씨 일가의 영원한 세습을 위한 수령에 대한 충실성입니다. 음악예술론에는 “수령에 대한 끝없는 흠모와 당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뢰, 수령과 당의 영도를 받는 혁명적 긍지와 자부심을 모든 생활적 감정 정서의 바탕으로 하고 그에 기초한 대중적영웅성, 희생성, 낙천성, 행복감과 같은 감정과 정서가 흘러 넘칠 때 그 음악은 인민대중의 자주적인 지향과 요구를 훌륭하게 구현할 수 있다. 주체음악의 혁명적 내용에서 근본문제로 되는 것은 수령에 대한 문제이며 수령, 당, 대중의 혈연적 연계에 관한 문제이다. 수령에 대한 끝없는 충실성과 그것을 핵으로 하는 당과 근로인민대중에 대한 충실성은 주체음악의 혁명성을 규정하는 기본내용으로 된다”고 강조한 것만 봐도 음악예술론의 반인민성, 기만성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인기 있던 외국 음악과 디스코춤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대중음악형식을 건전하게 발전시키기 위하여서는 제국주의자들이 퍼뜨리는 썩어빠진 대중음악, 재즈나 락, 디스코 같은 음악의 침습을 막고 저속하고 불건전한 향락과 기형적이고 타락한 취미를 조장시키는 사소한 요소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대중의 편이며 감성독재는 영원할 수 없음을 김정은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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