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칼라튜] 북한의 제네바 협정 위반

그렉 스칼라튜 ∙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사무총장
2019-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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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10년 전인 한국 국방부 국군포로대책위원회와 통일부는 윁남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1966년 9월 9일 사이공(현 호찌민)에서 실종되었던 당시 23세이던 안학수 하사를 납북자로 인정했습니다.  따라서 ‘윁남전 국군 포로 1호’인 안학수 하사는 남북한 전쟁 이후 첫 국군 포로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안 하사는 윁남전 때 포로로 잡혀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을 거쳐 강제 납북되었습니다.  북한 당국은 북한 방송으로 사실과 달리 안 하사를 월북자로 소개하고, 윁남에서 붙잡힌 그를 공산주의 선전을 위해 이용했습니다. 1970년대 중반에 한국에서 잡힌 남파 간첩의 진술에 따르면 1975년 안학수 하사가 북한을 탈출하려다 총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같은 진술에 따르면 안 하사는 온몸에 상처가 있었고  그런 상처는 안 하사가 당한 고문의  결과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1953년 7월27일 남북한 정전 협정후 1954년까지 진행된 포로 교환에서 국군 포로 8343명이 한국으로 송환되었습니다. 그 당시 북한은 "나머지는 모두 북에 전향했고, 따라서 국군 포로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1994년 조창호 소위가 탈북한 이후 총 80명의 국군 포로가 한국으로 탈북했습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전향한 적이 없다"고 증언했습니다. 국군 포로 사안을 중요하게 거론하는 한국 대북 인권 단체인 '물망초'에 따르면 북한을 탈출한 국군포로80명 중 27명이 아직까지 살아 있습니다. 국군포로들에 의하면 북한에서 그들의 인권이 수십년 동안 심하게 유린되었습니다. 그들이 평생동안 심한 차별을 당하면서 북한 아오지 탄광 같은 곳에서 강제노동을 하면서 지옥과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탄광에서 폐병에 걸려 사망한 국군 포로들도 많았습니다.

전쟁 중 군복을 입은 상태에서 포로로 잡힌 군인들은 국제인도법, 즉1949년 체결된 제네바 협정에 따라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1949년 제네바 협정에 따르면 포로를 억류한 국가나 단체는 그를 인도적으로 대우할 의무가 있으며 당연히 고문을 해서는 안되고 포로를 선전 목적으로 이용해서는 안됩니다.  윁남에서 포로로 잡힌 안 하사와 같은 경우 중국을 거쳐 강제 납북, 고문하고 선전 목적으로 이용하며 결국 암살했다는 것은 국제인도법과 국제인권법의 명백한 위반이었습니다.

2007년 미국 국방부는 ‘한국전쟁 포로들의 소련 이동 보고서’를 공개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국군 포로들이 소련으로 끌려간 장소와 당시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남북한 전쟁 때 붙잡힌 미군 포로들이 아직까지 로씨야 (러시아)에 생존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미국과 로씨야가 협력해 작성한 것이었습니다.

1992년 이 보고서 작성을 도운 전 북한 내무성 간부겸 군총정치국장이던 탈북자에 따르면 수천명의 국군포로들이 소련의 침엽수림 지역에 있는 수백여 개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쏘련 (소련)이 전쟁 포로들이 사망할 때까지 몇 십년 동안 침엽수림 지역 한가운데 있는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을 시켰다는 이야기도 전혀 새로운 소식이 아닙니다. 국제인도법에 따르면 전쟁이 끝난 후 적군 포로들을 송환해야 하지만, 쏘련은 항상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남북한 전쟁 이전 제2차 대전 때 야만스럽고 잔인한 대학살을 겪은 유럽의 유태인 다음으로 고통을 가장 많이 겪었던 사람들은 바로 쏘련 국민들이었습니다. 쏘련 군인과 민간인 모두 합쳐 2천300만명이 희생되었습니다. 또 많은 쏘련 사람들은 스딸린 (스탈린) 공산주의 독재 시대 때 수용소로 이송되어 침엽수림에서 사망했습니다. 로씨야군에게 잡힌 다른 나라 포로들의 운명도 비참했습니다. 지난 몇년 동안 로므니아 (루마니아) 언론은 쏘련군이 중앙아시아로 이송한 로므니아 포로들에 대해 보도했습니다. 그 로므니아 군인들은 복잡하고 비극적인 로므니아 근대사의 피해자들이었습니다 .

제2차 대전 때 로므니아는 나찌 (나치) 독일과 쏘련으로부터 최후 통첩을 받고 영토를 많이 잃었습니다. 또 로므니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나찌 국가가 되었고, 독일과 동맹을 맺어 쏘련을 침략하는 데 동참했습니다. 결국 로므니아의 젊은 왕이 쿠데타를 일으켜 나찌 정권을 무너뜨려 독일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므니아는 쏘련의 동맹국이 되었지만, 붉은 제국이던 쏘련은 역시 공산주의 개척국처럼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쏘련은 그전에 쏘련군에게 붙잡힌 로므니아 군인들을 송환시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로므니아와 쏘련의 휴전 상태를 무시하며 로므니아 군인들을 계속 포로로 잡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쏘련은 그들을 주로 중앙아시아에 있는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결국 쏘련군은 로므니아 왕을 추방했고 결국 로므니아는 공산주의 독재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천 명의 로므니아 군인들이 몇 십년 동안 소련 수용소에서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므니아 공산주의 정부는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몇년 전 로므니아 언론은 까자흐스딴 (카자흐스탄)에 있던 수용소에서 사망한 로므니아 포로들에 대해 많은 보도를 내놨습니다. 까지흐스딴 수도로부터 40km 떨어진 까라간다 (카라간다) 수용소에서 로므니아 군인 1천200명이 강제 노동을 하다 굶주림과 추위, 과로와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까라간다 수용소에서 사망한 독일, 일본, 이딸리아 (이탈리아), 마쟈르 (헝가리)와 핀란드  포로들을 위한 기념비들이 각 나라마다 있습니다. 로므니아 포로들을 위한 기념비는 단순한 검은 십자가입니다.

공산주의 독재 때는 소련 침엽수림에서 고생하다 사망한 로므니아 포로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었고 그들을 기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로므니아가 개방되어 그들을 기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북한 전쟁 때 국군 포로들의 운명 또한 제2차 대전 때 로므니아 포로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며 추운 소련 침엽수림에서 사망한 국군 포로들을 위한 기념비도 세워야 합니다. 북한이  국제사회에 참여하려면  국군포로들의 이송과 관련된 정보를 빠른 시간 내에 공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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